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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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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점동 작성일25-01-04 18:41 조회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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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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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바다해설사이시고 생선을 아름다운 그림처럼 꾸며서 먹고 싶게 만드는 생선회 전문가이신 조상제 선생께서, 오래 전에 제가 쓴 글을 찾아서 댓글로 올려 놓으셨습니다. 조상제 선생은 부산에서 작은 포럼을 만들어 함께 활동한 인연이 있는 분입니다.
 
아래 글은 지금부터 35년 쯤 전에 조상제 선생의 부탁으로 쓴 글인듯 싶습니다. 부산2020이라는 잡지에 게재했지 싶은데, 그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의 제 글솜씨가 투박하지만 오늘 다시 올려 놓습니다. 제 20대 후반의 신발공장에서, 낙망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아주 작은 사랑 실천을 했던 추억이 묻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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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에 있는 신발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1970년대 중반의 그때는 수출지상주의로 수출액만 늘일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던 때의 일이다. 우리가 일하는 부서는 총고무과(장화류를 만드는 부서)로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곳인데, 아침 6시 30분경에 출근하여 저녁 8시 30분 퇴근하며 쉬는 시간이라곤 점심시간 30분과 오후 4시에 10분간 휴식시간이 다였다.
 
여름에는 그래도 날이 샌 후에 출근하지만 겨울에는 먼동이 트기 훨씬 전에 일어나 출근하게 되는데, 이렇게 일하고 한 달에 받는 월급은 남자가 3만 원 정도고 여자들은 2-3만 원이었으며 2만원 미만도 많았다. 그러니 노동자들의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제대로 쉬지 못하고 한 달 내내 일해 보아야 쥐꼬리 만큼의 월급을 받을 뿐만 아니라, 신발공장은 거칠기까지 하였다. 여성 노동자들에게 육두문자가 춤을 추는 것은 물론, 구타 사건도 심심찮게 있었다. 거기다 성문란 사건도 더해 농사꾼 출신인 나 같은 촌놈에겐 놀라움만 먹고 살아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한 일년쯤 지나 공장 생활에 익숙해지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 부산에서, 사람도 사귀고 하다가 참한 아가씨들 10여 명과 “샘물회”라는 작은 모임을 하나 만들었다. 자주 모여서 대화를 나누다가 한 가지 일을 추진하였는데 “사랑의 성금 모으기 운동”이었다. 한 달에 100원씩 모아서 그 돈으로 학용품이나 음식을 사서 고아원, 양로원을 방문하자는 것이었다.
 
우리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누구든지 한 달에 100원씩을 기꺼이 낼 수 있는 사람이면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고아원을 방문하여 꾸준하게 정을 나누기도 하였는데 의외로 호응이 좋았다. 깜짝깜짝 놀라게만 하였던 공장이 이 일을 시작하고 부터는 신바람 나는 공장이 되었다.
 
우리 회의 멤버들도 대개 시골 출신의 순박하고 참한 처녀들로, 전라도 고흥이나 경상도 상주, 강원도 고성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그 아가씨들의 월급이 2만 5천원 정도일 때이니 매달 100원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쉬는 날이 많고 근무조건이 좋아진 후에 받는 월급의 1,500원과 비교한다면 말이다.
 
이렇게 해서 매달 100원씩 내는 회원이 늘어나 우리 총고무과에서 일하는 1천여 명 중에서 약 20퍼센트 정도인 200명 정도가 회원이 되어 성금을 모아갈 때였다. 하루는 과장이 나를 부르더니 그 일을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평소에 나하고는 잘 지내고 있는 처지였었다. 나는 현장 노동자로 당시의 내 위치는, 과장 밑에 계장, 계장 밑에 주임, 반장, 조장 밑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내가 하는 일이 눈에 잘 뜨이기도 하였지만 우리 부서 내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들이 안 하는 청소라든지, 업무 개선 건의 등. 그런데 현장의 일개 노동자를 부르더니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로 고함을 지르면서, 사랑의 성금 모으기 운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결론은 네가 그런 일을 하다가 노동운동으로 나가는 것 아니냐, 그러니 그런 일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것을 잠시 후에 알게 되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정말 참 순수하게 사랑의 성금을 모았고, 그 돈을 어떻게 하면 보다 유용하고 좋게 쓸까를 고심하면서 고아원을 돕고 있었는데 상상도못했던 노동운동 쪽으로 몰다니. 아무튼 그일 이후에 사랑의 성금 모금 운동은 중단되었고, 나도 그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때 우리 회원들은 한 달에 100원씩을 모아서 마지막 휴일에 고아원을 떼지어 방문하였는데, 고아원에 가서 어린이들을 보면서 많이도 울고 마음 아파하였다. 이제는 다 결혼해서 학부형이 되었을 그때의 그 귀한 마음의 회원들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들의 순수했던 사랑의 성금 모으기 운동을 이상한 눈으로 보았던 그들의 마음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6년 전(1984년)부터 기러기문화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면서도 그런 시선을 무수히 느끼고 있다. 한 달 회비 1천 원만 내면 온 가족이 좋은 책을 마음껏 빌려 읽을 수 있다고 할 때도 그런 눈은 번쩍거렸고, 사랑의 금고 운동을 펼치고 있는 지금도 그런 눈은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되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지만 이제는 제발 순수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순수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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