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엔 가슴이 뜨거운 한 남자가 있었다
부산지하철 2호선 지게골역 3번 출구를 나와 문현교차로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기러기문화원’이라는
입간판 하나를 만나게 된다. 입간판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쪽 작은 골목을 빠져나가면 벽산기린아파트로
오르는 야트막한 비탈길이 보인다.
그 비탈길의 길목에 서 있는 4층 건물의 2층. 여기가 바로 기자가 찾아간 ‘사단법인
기러기문화원’이다. 기자는 여기를 한 두 차례 들락거린 것이 아니지만, 이곳을 찾을 때마다 가벼운
흥분에 달뜬다.
가슴이 뜨거운 사람, 50대 중반의 한 남자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조점동. 그렇다. ‘기러기문화원’의 조점동 원장은 가슴이 뜨거운 남자다. 늘 새로운 꿈을 꾸고 그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 언제봐도 그에게는 신선한 힘이 샘솟는 것 같다.
‘기러기문화원’을 살펴보기 전에 기자는 잠시 조점동이라는 한 인물을 먼저 살펴 보려한다. 그것은
조점동이라는 이름을 빼고는 결코 ‘기러기문화원’을 이야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북 임실의 작은 산골마을이 고향인 조점동은 어린시절부터 척박한 산골마을이 안겨준 가난에 부대끼다
그만 배움의 기회조차 놓치고 만다. 그에게 있어 제도권 교육의 혜택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때문에 소년 조점동은 가난과 씨름을 하면서도 배움에 대한 목마름으로 신열을 앓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또래 친구들이 학교에 가 있는 시간에 그는 자신의 손이 닿는 대로 무엇이든
읽을거리가 있으면 놓치지 않고 읽었다.
하기야 1960년대의 산골에 무슨 변변한 읽을거리가 있었겠는가. 고작 낡은 잡지가 아니면 묵은 신문
등속이었겠지만, 그래도 그는 그것들을 읽고 또 읽었다. 어쩌다 마을 형들이 읽다 버려둔 위인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여간 큰 행운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책 속에서 세상과의 대화를 나누고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한 조각과 길섶에 피어있는 풀꽃 하나에서 조차 삶의 진리를 깨달아 갔다.
그것은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이었지만, 어린 조점동이 생각의 그릇을 키우고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히는 데 있어 그것들은 실로 적잖은 자양분이 돼 주었다. 그렇게 차츰 세상에
눈떠가던 조점동은 이 무렵 4H클럽 활동에 뛰어들게 되는데 이는, 소년 조점동이 나중에 사회운동가로
우뚝 서게 되는 단초로써 의미 있는 첫 발걸음이었던 셈이다.
4H클럽을 통해 마을문고를 만들어 독서보급운동을 시작했고 마을 공동작업 시설을 설치, 마을의
수익사업에도 눈을 돌렸다. 한편, 문맹퇴치운동에도 열정을 바쳤는데 당시만 해도 시골에는 학교 문
앞에도 못가 본 문맹자들이 많아 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일은 조점동에게 있어 다른 무엇보다도 보람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배움에 목말랐고 배우지 못한 서러움에 눈물을 흘려봤기 때문이다.
작은 문방구에서 시작한 ‘책 나누어 보기’
“반갑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꾸밈없는 눈웃음으로 맞아주는 조 원장은 자리에 앉기가 바쁘게 책 한권을 내 놓는다.
“며칠 전에 쉰다섯 번째 생일을 보냈고, 이제 곧 결혼 30주년을 맞게 되거든요……”
‘아, 그래서 낸 책이구나.’ 속으로 짐작하며 받아 든 책의 저자는 아니나 다를까 조점동.
|
|
|
▲ 조점동 원장이 최근에 펴낸 책 |
|
ⓒ 전영준 |
표제는 [가진 것이 없어도 성공할 수 있다]. -한 사람의 55년 동안의 삶과 사회활동 속에서 터득해
낸 성공과 행복의 지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동안 집필해 낸 책만도 열권은 넘을 테고 엮어 낸
책도 수월찮은데 또 이리 책을 냈나 싶다.
조 원장의 왕성한 저작활동은 그를 아는 사람들로 하여금 배움이란 반드시 학교 교실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해 준다. 아마도 어린 시절, 배움에 대한 갈증으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독서에 열중했던 결과의 산물이리라. 지금도 그는 책과 벗하며 살고 있다. 그의 집무실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책이 줄잡아 5천권은 넘어 보인다.
사실, ‘기러기문화원’도 이웃과의 ‘책 나누어 보기’에서부터 출발했다.
“시작은 1984년 6월이었지요. 당시 제가 생업으로 꾸려가고 있던 문방구의 한 귀퉁이에 제 손때가
묻은 300여 권의 헌책들을 내다놓고 이웃들에게 빌려주면서부터 입니다.”
그러나 그의 도서 무료대출사업은 1년 반 만에 대부분의 도서가 분실돼 대출을 일시 중단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그러다 1986년 5월부터 독서회원제를 도입, 가입비 1천원에 월 회비 1천원으로
회원 1백여 명을 확보하여 ‘책을 아끼는 사람만이 책을 읽을 자격이 있다’는 새로운 독서 풍토를
만들어 냈다.
1988년 올림픽을 전후해 장서수가 3천여 권으로 늘어나면서 문방구점 인근에 별도의 도서원을 열게
되는데 이것이 오늘날 뜻있는 이들의 입에서 주창되고 있는 이른바 ‘작은 도서관 운동’의 효시가 된
셈이다.
이후 ‘기러기문화원’은 그의 열정을 눈여겨 본 이종호(61세, 기러기문화원 이사장)씨 등 이 지역의
유지 10여명이 참여하면서 문현 3동 새마을문고 2층을 거쳐 1991년 8월에 부산광역시 남구
문현4동 351-12번지, 지금의 이 자리에 새로 둥지를 틀게 됨으로써 비로소 본격적인 지역사회
문화센터로서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이에 대해 조점동 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처음 이것을 시작할 때, 아무도 몇 권의 도서대출 사업이 지역사회 문화센터로 발돋움 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못했지요. 많은 사람들이 작은 일에 무관심하고 큰 일, 돈과 명예가 따르는 일부터 시작하려
할 때, 우리는 무리하게 프로그램을 늘리려 하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씩 하나 씩
최선을 다해 벌여 나갔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기러기문화원’은 1989년에 부산시에 사회단체로 정식 등록되고 1995년 4월에는
사단법인의 허가를 받게 된다. 그러면서 날로 내실을 다져가고 있는 ‘기러기문화원’은 기존의
생활독서운동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청소년 문예교실’ ‘독서교실’ ‘글짓기교실’ ‘기러기
독서문화대학’ ‘한글교실’ ‘한자교실’ ‘부부교실’ ‘할머니대학’ ‘어머니교실’ 등 이름을 대기만도
숨이 가쁜 각종 강좌들이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역 자선은행, ‘좋은 이웃’출범
|
|
|
▲ 부산바다축제에 참가한 기러기문화원과 남구자원봉사센터 회원들 |
|
ⓒ 전영준 |
‘기러기문화원’은 이웃과 이웃이 마음의 벽을 허물고 서로 따사로운 이웃 사랑을 나누게 하는 데도
적잖은 공력을 들이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지역 자선은행인 ‘좋은 이웃’이다.
‘우리 동네에 살고 있는 어려운 사람은 우리 스스로 돕고, 밝고 아름다운 일을 통하여 좋은 이웃이
되자’는 취지로 지난해 3월 19일에 발족한 ‘좋은 이웃’은 알뜰하고 검소하게 살아가면서 매달
1,000원 이상 씩 후원금을 내는 이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로 꾸려나가고 있다.
어느새 1년이 지나 지역 자선은행으로서의 위치를 탄탄하게 굳혔다.
이러한 교육활동과 지역 문화사업을 진정한 시민운동으로 일궈내기 위해서 조점동 원장이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일의 하나가 1997년에 개설한 부산광역시 남구 자원봉사센터 운영이다.
|
|
|
▲ 문화학교 강좌 |
|
ⓒ 전영준 |
“시간이 있는 사람은 시간을,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재능이 있는 사람은 재능을 내 놓을 때
자원봉사는 활성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만이 자원봉사의 참
의미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웃을 위해 따뜻한 미소로 친절을 베푸는 것도 훌륭한 자원봉사가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말하는 조 원장은 요즘 중, 고생들의 자원봉사 시간의 점수화는 오히려 청소년들이 자원봉사의
참뜻을 인식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고 일침을 가한다.
부산지역 지역사회 문화운동 모델
‘기러기문화원’이 펼치고 있는 야심 찬 여러 활동 중에는 격월간 ‘좋은 세상’의 발행과 해마다 6월과
10월에 두 차례 열리고 있는 ‘문학과 음악의 밤’ 행사가 있다.
|
|
|
▲ 격월간 '좋은세상' |
|
ⓒ 전영준 |
‘1984년 9월 1일에 첫 호를 내 벌써 지령이 151호에 이른 ‘좋은 세상’에는 문화원과
자원봉사센터의 활동 소식과 지역문화정보 외에 읽는 이들의 가슴 속에 잔잔한 감동의 여운을 남겨주는
‘좋은 세상 이야기’ 가정의 행복과 즐거운 생활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가족 사랑법’ ‘문화시민의
예절과 매너’ ‘성공학 이야기’ 들이 담겨져 있어 이 지역 주민은 물론, 부산전역에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좋은 간행물이 하나 탄생했는가 싶으면 하루아침에 종적을 감추고 마는 문화환경에서 지령
151호까지 이어왔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학과 음악의 밤’ 행사도 그동안 횟수를 20회를 넘겨 어엿한 지역문화행사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기자도 7년 전, 이 ‘문학과 음악의 밤’ 행사에 초대되어 아내와 함께 시낭송을 하면서부터
‘기러기문화원’과 인연을 맺게 되었지만, 이 행사는 고달프고 각박한 도시생활에서 자칫 마음이
메말라지기 쉬운 도시인들에게 생활의 청량제 구실을 해 오고 있다.
|
|
|
▲ 문학과 음악의 밤 |
|
ⓒ 전영준 |
초대 손님으로 음악봉사를 하고 전문 시낭송의 진수를 보여주는 외부인사도 가끔 참여하지만, 이 행사의
주인은 단연 이 지역 주민들이다. 비록 문학적 완성도에는 미치지 못해도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사연들을 시와 산문으로 엮어내 참석자들로 하여금 곧잘 눈물을 흘리게도 하고 웃음을 터뜨리게도
한다. 이로써 평소 관계가 소원했던 이웃들 사이에 따사로운 사랑의 공감대를 형성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문학과 음악의 밤’이다.
“기러기문화원‘은 자주 자립 단체입니다. 특정한 개인이나 단체의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의 회비에 의해
운영되는 주민 모두의 것입니다.”
그렇다. 19년 전, 작은 문방구에서 출발해 오늘날 이렇듯 번듯한 지역사회 문화센터로서 지역주민
모두의 사랑을 받는 문화 공동체가 된 것은 주민 모두가 자주 자립의 정신으로 함께 참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러기 문화원’은 이제 부산지역 지역사회운동에 있어 하나의 모델이 되어 뜻있는 지역
인사들이 ‘기러기문화원’의 운영방식을 참고로 이와 유사한 문화단체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자신의 말처럼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전라도 촌놈’이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나 19년 전
당시의 그 두텁기 그지없던 지역감정의 벽을 어떻게 극복해 내고 이 지역에서 사랑과 화합의 공동체를
일구어 내었는지가 못내 궁금하였지만, 막상 그 질문은 하지 못하고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아마도 그것은 일찍이 흥사단 활동을 통해 체득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무실역행(務實力行) 정신, 즉
참되고 실속 있도록 힘써 실행하는 삶을 올곧게 살아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또한 누구든지 사랑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의 삶의 열정이 주변을 서서히 변화시켰음직도 하다.
가슴이 뜨거운 사람, 조점동 원장을 만나고 나오다가 1층 현관에서 40대 중반은 넘었음직한 아주머니
서너 분을 만났다. 무거운 가방을 든 품새로 보아 ‘기러기문화원’의 늦깎이 학생인가 보다.
|
|
|
|
|
|
|
2003-05-15 17:06 |
ⓒ 2006 OhmyNews
|
|
|
|
|